여자친구가 출장을 갔다. 출장이란 무어냐. 자고로 회사원의 꽃이 아니더냐. 지겨운 사무실을 벗어나 콧구녕에 바람도 좀 넣고 회삿돈으로 차비도 숙박비도 밥값도 오케이, 게다가 '나 출장 다녀왔어'라는 말이 주는, 뭔가 내가 회사에 중요한 인물일 것 같다는 딱히 근거는 없는 미묘한 만족감. 아무래도 출장 기회가 거의 없는 직종에 있기 때문에 더 그러겠지만, 인간 자체가 워낙 로망 지향형이라 이딴 것도 로망화해 버린다. 어쨌건 그동안 내게 출장은 전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출장을 갔다 하니 이건 얘기가 백팔십도도 모자라서 김연아의 멋진 트리플 악셀 후에 반바퀴를 또 도는, 그러니까 얼마냐, 삼백육십 곱하기 삼에 백팔십을 더한 숫자만큼 달라지는 거라. 외로운 밤을 보내게 생겼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고(원거리 연애지 말입니다), 암튼 별로 달갑지도 않은 일을 하러 장시간의 이동 후 낯선 도시의 여관방에서 홀로 잠드는 그녀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그녀는 사실 신났는데 나만 이렇게 사서 걱정하는 거라면 좋겠지만, 그녀도 지금 심기가 불편한 상태다. 이제야 깨달았다. 출장의 로망은 '남성'에게만 성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괴로운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문득 '사랑은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들었던 '그저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 상대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증명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생각(뭐 별로 진지하게 고민한 건 아니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나 할까. 물리적 거리가 있는 상황에서 내가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증명하는 방법은 그리 다양하지 못하다. 아니, 우리에겐 '말'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보다는 항상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있고 네 힘듦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런 널 언제까지고 다독여 줄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그것도 전화 통화를 통한) '말'밖에 없다. 네이트온 기프티콘 같은 걸로 물질 공세를 펴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듯 그녀가 이런 내 사랑을 잘 느낀다고 하더라도(즉, 내 증명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너무 무력해지는 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루 종일 널 쓰다듬고 안아 주었던 말들이 점점 '약빨'이 떨어져서임을 느껴서 였을까, 퇴근길의 마지막 통화에서는 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널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랑을 네가 느낄 수 있도록 온갖 수단을 다 써서 표현하고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오늘 같은 날을 보면 분명 있긴 있나 보다. 그래도 그것보다 더 어쩔 수 없는 일, 그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너를 향해 바짝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나.나는 네게 문자를 보냈다. "2009년 7월 8일 새벽 2시 37분부터 오전 8시까지, 나는 당신의 가장 편안한 팔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