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일 수요일
어떤 글의 첫머리
생각해 보면 요 몇 년간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모든 지난 시간이 전부 과거일진대 과연 언제를 기준으로 그 이전을 ‘과거’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건 내가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경계란 대체로 내가 ‘사회적 그물망’에 포섭되기 이전인 스물셋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뒤의 시간들이라고 썩 마음에 들었다 ㅡ 열등감의 요소가 없었다 ㅡ 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시간들은 이전 시간들에 의해 어느 정도 규정된 것이었고(이를테면 ‘깔때기 효과’ 같은 것에 의해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깔때기 속에 주어져 있는 ‘상수’(常數)들의 포위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내 삶에 충실한 선택을 하려고 아등바등 대기는 했다는, 약간의 자기위안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열등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 그러고 보니 이건 적당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존재로서의 열등감’이다. 그걸 ‘내가 그 시간들을 그렇게 안 보냈더라면 지금 이러고 있진 않을 텐데’ 하는 식으로 핑계를 대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대학 때 미술 교양 과목 리포트에서 썼던 표현대로 “압살적 입시교육에 감수성을 말살당하고, 법칙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에 이성을 저당 잡힌 탓에” 나는 그게 내 자신이 되었든 타인이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무엇인가와 진실하게 대면하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의지가 없는 건 분명 아닌데, 잘 안 되었다. 물론 순간순간의 감정들은 있었지만 내 삶으로 체화되지 않았다. “추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란, 어떤 대상이건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라는 말, “감수성은 ‘상처받을 수 있음’이다”라는 말.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모습들이다. 그 부재가 내 열등감의 원천이다. 나는 언제나 비평하고 조정하는 자였지, 행동하고 느끼는 자는 아니었다.
나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보다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든가 “때가 되면 다 되게 마련” 같은 말들을 더 믿는 편이다. ‘바로 그때’ 느껴야 할 감정들을 ‘머리로’ ‘뒤늦게’ 가지려고 해봐야 그 감정이 그만큼 충실할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공평하다. 무엇인가가 자신을 찾아온 그 순간순간에 스스로에게 충실했던 사람들과 그것을 방관하고 밀어내기에 바빴던 내게 똑같은 선물이 주어져서야 쓰겠는가? 물론 노력을 하면 지금보다 아주 조금씩 나아지기야 하겠지만, 이미 감수성이라는 무기를 탄탄하게 갖춘 사람들을 따라가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비단 유명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감수성이 뛰어나고 또 그것을 ‘좋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기가 죽고 배가 아프다. 이제는 만성이 되었을 법도 한데, 문득문득 내 과거가 후회스러워 견딜 수 없을 때가 아직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다. 콤플렉스에 휩싸이거나 혹은 어떤 다른 이유로 식음을 전폐한다거나 새벽까지 잠을 설치는 것은 영 체질에 맞지 않는다(아아, 하필이면 그런 모습을 동경한다는 데 나의 기묘한 악순환이 있다). 나는 나를 아껴 주고 보호해야 했다. 못하는 게 있으면 일찌감치 인정해 버리는 게 속 편했고, 그런 내 모습을 자조하면서 꽤 쏠쏠한 안줏거리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자조만으로는 참 몹쓸 인간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마치 세상이 졸라 안 바뀌는데도 사회운동을 그만둘 수 없는 활동가의 심정으로 나라는 놈을 계속 괴롭혔다. 너, 그거 맞냐? 너, 아예 생각 안 할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했는지는 설명하기가 곤혹스럽다. 아, 어쩌면 꽤나 메이저스러운 주변 환경 속에서도 다소 마이너틱한 직업을 선택했던 것 자체가 내겐 하나의 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분명 나는 나를 ‘그냥’ 두지는 않았다. 나를 오래 봐 온 사람 중 혹시라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들은 포기해 버린 부분을, 그 안 되는 부분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바득바득거리는 가련한 중생을 보면서 받는 어떤 위안 혹은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 어쨌건 그 ‘콤플렉스’에 맞서 나를 살게 한 것은 이런 최소한의 자아존중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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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저랑 반대이신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인간이고 물론 계획적이기는 해도 진실로 무언가 행동해야 할 순간이 오면 순간적인 판단으로 직감에 의지해서 POP. 감수성이란 상처받을 수 있음, 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처도 잘 받아서 몇 년 전에 (남들이 보기엔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트라우마로 스스로 삼아버린다능.
답글삭제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수은 - 2009/07/02 09:08
답글삭제응, 반대이면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할 정도로요.:) 저도 (미루고 미루다가) 무언가 행동해야 할 순간이 오면 (직감도 없어서) 에라, 모르겠다, 질러버리곤 하는데, 이건 비슷하다면 비슷한 건가? 호호.
말씀하신 트라우마는 '특정한'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일반론적 이야기인가요-
@Anonymous - 2009/07/02 09:11
답글삭제비평만 하는 거 아니라 응원하고 지원할 게요. 냐하하
많은 느낌을 나누어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