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아홉 시 반. 고속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책을 폈지만 야근까지 하며 혹사당한 눈이 괴로워하는 바람에 다섯 정거장도 채 가지 못해 덮어버렸다. 엠피쓰리를 꺼냈지만 하루 종일 가방 속에 누워 편히 잠만 자다 보니 힘이 부쳤던지 다섯 정거장도 채 가지 못해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나는 맞은편 좌석에 조로록 앉은 7인의 인물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일곱 명 중 남자가 둘, 여자가 다섯이었고, 액면상 20대가 하나, 30대가 셋, 40대가 하나, 50대가 둘이었다. 책을 보는 사람이 둘, 신문을 보는 사람이 하나, 음악을 듣는 사람이 하나,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이 둘, 나처럼 앞자리를 훑어보는 사람이 하나였다. 그러다가 내가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어 피식거렸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것처럼 "형씨, 2008년 6월 5일 밤 10시 13분에 서울 지하철 3266열차 4호차 좌측열 세 번째 칸에는 '캄보디아 정부 최초 1기 신도시 개발. 앙코르와트 관광복합신도시 상업용지 지급'이라는 존나게 끔찍하고 어이없는 광고문구가 실린 신문을 펼쳐 든, 옥색 넥타이를 한 40대 남성 회사원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오?"라고 하기라도 하려고? 순간 나처럼 앞자리를 훑어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언젠가 길에서 마주치면 그 남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가 오고 있다. 지금 그녀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인간들과는 달리 내 삶에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항상 애틋하게 느껴지는 우리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가장 절절하게 느껴지는 때는 바로 이때다. 그녀의 도시도 아니고 중간 지점도 아닌, 내가 사는 이곳으로 그녀가 오고 있을 때. 이때 그녀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줄이기 위한 투쟁을, 홀로, 묵묵히, 차근차근 해내고 있는 것이다. 거리를 지우는 데에는 돈도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자원은 처음에 투여하기만 하면 그 뒤로는 저절로 굴러가는 반면 '몸'은 끊임없이 소모된다. 다섯 시간의 버스 이동은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녀가 몸으로 각인하고 있을 그 시간들을 조용히 어루만져주며, 고속도로 사이의 어느 지점에 별처럼 박혀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맹렬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아름다운 별을.
그녀의 버스가 도착할 시간보다 30분 정도 빨리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기차가 아닌 버스를 기다릴 때에는 언제 도착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스릴이 있다. 새 버스가 들어오면 벌떡 일어나 앞 유리창의 시간과 출발지를 확인하고 '에, 아니네' 하면서 다시 벤치에 주저앉기를 수차례. 어디까지 왔는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부러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지는 않았다. 농축시키고 압축시킨 그리움이, 그녀와 내가 마주서는 순간 폭발하도록 말이다.
벤치 옆 자리에 앉은 사내는 연신 담배를 태웠고, 반대편의 아가씨는 PDA로 고스톱에 열중했다. 박스를 옆에 둔 아줌마 한 분은 전화를 걸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딸에게 신경질을 냈다. 까까머리 중학생 넷이 전주에서 도착하는 버스를 보고 "저기닷!" 하며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지난 겨울방학 때 놀러갔다가 만난 시골 친구라도 오는 모양인지 어깨동무를 하며 짐을 서로 들어주겠다고 난리다. 요즘 참 보기 힘든 광경이지 싶어 괜스레 흐뭇해진다.
논산에서 광주에서 군산에서 보령에서 춘천에서 고창에서 순창에서 꾸역꾸역 몰려들어 사람들을 한가득씩 뱉어내고 사라져가는 버스들. 곳곳에서 이 나라의 수도를 향해 금요일밤을 질주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나는 내 앞에서 서성거리던 한 아가씨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충실하게 버스 입장 - 기립 - 버스 확인 - 착석의 프로세스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세 대쯤을 함꼐 허탕 치자 묘한 동질감이 솟아났다. 그녀와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그저 각자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상대의 무사한 도착을 빌어주었다.
어쨌거나 반복되는 허탕에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몸으로 줄여온 우리 사이의 거리가 한시라도 빨리 0mm로 수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목이 바짝바짝 마른다. 자판기에서 쿠우를 뽑아 먹는 초등학생에게 한 모금만 구걸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어른의 품위를 지키기로 했다. 오랜만의 키스를 위해 아까부터 참고 있던 담배가 자꾸 땡긴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고 코로 들숨과 날숨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버스 한 대가 매끄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하차 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버스 앞 유리창에 적혀 있는 그녀의 출발지와 출발 시간.
입으로 파아, 숨을 내뱉으며 두근두근 버스 앞문으로 향한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 지어 땅을 밟는다. 나는 두 발을 어꺠 넓이로 벌리고, 고생한 그녀에게 선사할 따뜻한 눈빛과 포옹을 준비한다. 아니, 그런 준비는 부러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되는 거라고 말해야겠지. 그녀가 계단 앞에 한 발짝을 내딛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 눈 속에 담긴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빛이 안도를 거쳐 사랑의 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저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작지만 서로를 향해 빛을 뿜어왔던 두 개의 자그마한 점이 비로소 맞닿아, 지상에서 가장 밝은 빛을 내기 직전의 순간일 것이다. 이렇게 '긴' 거리를 줄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내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어랏, 트랙백이다!
답글삭제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수은 - 2009/06/08 21:44
답글삭제이까짓 것 일도 아닙니다. 후후훗-
@Anonymous - 2009/06/08 21:53
답글삭제많이 부족한 선물이지요. :)
근데, 난 솔직히 요새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p 그래도 이거야 원, 쥐박이 세상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이니, 잘된 일인지 안 된 일인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