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철학자 말고 철학을 공부하는 도정에 있는 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우월감. 마치 진짜 운동가 말고 학생운동에 입문하는 풋내기들에게 드는 감정과 비슷한 그것. 자신이 알고 있는 '개안'(開眼)의 길을 따르지 않는(혹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답답함과 어떠한 종류의 책임의식 같은 것. 부정적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다. 분명 나 스스로 그런 걸 동경하는 부분이 있으니까(그들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찾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괴리를 메울 언어와 인식은 너무도 빈약하다. 그저 '도약'만이 필요할 뿐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도약을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힐책한다. 이러한 과정은 필수 불가결한가? 어디까지가 건전하고 발전적인 압박인가? '그래도 나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아냐?'라고 생각하기를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세계.
- 동생은 면접시험에서 또 떨어졌다. 이 단락을 쓰면서, 첫 문장을 쓰면서, 혹은 하루 종일, 나는 녀석에게 짠한 마음만 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픈 마음만 들었다. 돈 벌라고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기운 차릴 뭐래도 좀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그런데 가만히 "면접시험에서 떨어졌다."라고 쓰고 윗 문단을 힐끗 보니, 그래도 너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말해 주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한번도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일은 꼭 이 말을 해줘야겠다.
- 신당역에서 환승을 하려다가 막차가 15분이나 남았길래 개찰구 밖으로 나가 화장실을 갔다. 소변을 보고 나와 다시 플랫폼으로 돌아가려니 너무 귀찮은 거라. 그러다가 증명사진 찍어 주는 기계를 발견했다. 하루 종일 땀에, 일에, 술에 쩔어 피곤한 얼굴인 거 뻔히 알면서도, 안 그래도 증명사진 필요했잖아? 하면서 호기롭게 커튼을 젖히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반투명 검은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발 할 타이밍을 놓친 머리는 부스스하고, 눈 밑에는 피로도를 보여 주는 붉은 게이지가 생겨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리 잘 봐 줘도 도저히 사진을 찍을 몰골이 절대 아닌데, 나는 증명사진의 본질적 목적에 부합할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졌다. 일상을 살아가는 날것 그대로의 나. 가끔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을 때처럼 무언가 그럴싸한 배경을 깔거나 연출하고 싶은 모습이 있다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적나라하고 솔직한 나, 그런 나 하나쯤 남겨 두어도, 그런 나 하나쯤 네게 보여 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자세를 조정하고, 머리도 조금 매만지고, 가방도 고이 벗어 내려놓고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기계의 창에 이상한 문자들이 떠 있는 게 수상하긴 했으나, 아무리 긁어도 인식을 못할 줄은. 쳇, 내가 뭐 그렇지, 흥칫핏. 그 대신 택시 타고 집에 왔지 뭐야.
- 외로움이라는 괴물은, (연인 사이에서) 상대하기가 참 곤혹스럽다. 상대를 적당히 바꿔 가면서 들이쳐 댄단 말이지. 내 외로움은 어찌어찌 이겨 내더라도 상대의 외로움까지 상대해야 한단 말야. 흠. 이 못된 녀석.